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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스(Levi's)는 바바리아 출신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가 1872년에 특허를 얻어 생산한 청바지 브랜드를 일컫는다. 청바지를 입지 않는 나로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바지 주머니의 리벳으로 유명한 이 상품이 청바지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열광시켜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로 정착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청바지는 서구, 특히 미국의 개척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고가의 빈티지 진도 있지만 다른 의류에 비해 저렴하고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착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에 청바지는 지역, 세대, 성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착용하는 대표적인 옷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된다. 김지민은 영국 유학 중 이 리바이스 라벨에 주목하여 대량의 상표를 입수, 그것으로 바지를 만들어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한다. 김지민이 리바이스 상표로 만든 바지, 목도리, 장갑 등은 실제 매장에서 판매되는 청바지와 하등 상관없는 위조된(pseudo) 것이자 진짜의 모조품(simulacrum)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 의류들은 유명상표를 재료로 하여 만든 진짜(genuine) 확실한(authentic) 물건이자 작품이다. 그러나 리바이스 라벨은 상품 자체는 물론 패션까지 소유하고자 하는 청춘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이 지닌 비평적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확실한’ ‘진짜’임을 강조하여 소비욕구를 자극, 충동하는 상표를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자본주의와 상업주의의 구조는 물론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소비의 정치’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논쟁적이고 담론생산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리바이스는 물론 아디다스, 나이키 등 다국적 기업의 대표적인 브랜드들은 젊음, 건강, 도전, 개척정신, 육체의 아름다움 등을 내세워 시장을 확장하며 소비자들의 기호(嗜好)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수익을 창출한다. 이때 이들 기업의 대표적인 상표는 시장자본주의 소비미학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하나의 상품에 부착되는 라벨의 수는 제한되지만 김지민은 동일한 라벨을 수없이 이어붙임으로써 그 라벨의 흡인력(charisma)을 해체하는 전략을 통해 시장자본주의의 상품미학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미키 마우스 폭탄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미국 문화산업을 대표하는 캐릭터이자 아이콘이며 하나의 심볼이자 기호(sign)가 된 미키마우스와 역시 미국적 개척정신의 세계화, 미국적 취향의 수출에 앞장선 리바이스 라벨과의 기막힌 결합의 대단원은 폭발이다. 말하자면 리바이스로 무장한 미키마우스가 전시장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폭발의 대단원이 자본주의와 문화산업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폭발의 결과는 마치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수많은 클론을 만들어낸 손오공처럼 사방으로 확산되는 리바이스, 즉 자본과 기술, 광고, 테크노크라트에 의해 생산된 상품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볼 수도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의 작업이 중의적인 만큼 해석의 가능성 또한 열려있다. 즉 그의 라벨작업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거나 숭배가 아니라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을 단순히 시장자본주의가 걸어놓은 최면, 이를테면 패션, 모드에 대한 풍자적 비판으로만 규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풍요를 약속하는 광고산업을 예찬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 그의 작업은 이 양단의 빈 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The Fan>이란 작업을 보자. 놀랜드(Kenneth Noland)나 스텔라(Frank Stella)의 하드에지 경향이나 미니멀리즘의 형식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의 제목은 그 형태를 통해 연상할 수 있듯이 선풍기, 부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어의 ‘팬’이 열광적인 애호가 또는 지지자를 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라벨로 구성된 이 원반은 무엇인가에 열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일종의 블랙홀과도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뒤집어 이어붙인 라벨로 만들어진 무한확장형의 블랙홀, 그것은 소비사회가 걸어놓은 주술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만드는 통로이자 덫이며, 소비와 소유의 욕망이 빠져드는 ‘유혹하는 심연’이다. 아니면 욕망하는 시선이 빨려들 수밖에 없는 늪일까. 동일형태의 무한확장과 번식의 형식을 지닌 <The Fan>에 비해 파도의 패턴을 시각화해 놓은 작품은 메두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거나 히드라의 머리 또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확장된다. 모든 것을 잡아 삼키는 ‘욕망하는 촉수’를 구성하는 세포는 당연히 상표이다.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치명적인 유혹의 마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상품이 아니라 그것을 판매하는 광고에 포위당해 있고 자본주의의 진열장 속에 갇혀 있는 이 현실을 거부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하나의 분열이 파생한다. 그것을 김지민은 ‘Vanitas-holic’이란 제목으로 드러낸다. 바니타스란 허망한 것, 덧없는 것이고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지민의 라벨작업은 상품으로 향한 욕망은 허망한 것이지만 그 욕망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 지향점이 불분명할 수도 있다는 가설에 기초하고 있다. 물질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소유하더라도 욕망은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이 지점에서 김지민은 자본주의, 상업주의 코드에 대한 추종이나 거부를 떠나 우리는 어차피 그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이것을 자본주의 사장경제에 대한 항복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만은 않음을 그의 작업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형태를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그 형태를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작품에 생기를 부여한다. 즉 그의 작업은 회화적 부조이지만 그 과정은 애니메이팅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형태가 완성되었을 때 그 결과는 인디언의 주술적 패턴을 연상시키지만, 이 형태는 원래 했던 방식의 역순으로 해체된다. 그것을 그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했다 사라져버리는 것, 즉 바니타스로 보고, 이 허망한 것에의 무한집착, 몰입이란 소비사회의 특성에 주목한 ‘holic’을 결합시킨 것이다.

지금도 김지민은 라벨을 소재로 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작년 한해만 하더라도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치를 만큼 그의 생산력은 거침없다. 이러한 생산력은 특유의 성실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작업의 방식이 지닌 확장가능성에서도 기인한다. 물론 그의 작업은 수많은 라벨을 접착하거나 실로 꿰는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노동집약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그 형태나 규모는 일정한 규칙만 정해 놓으면 단순반복적인 방법으로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다. 손바느질은 시간과 투쟁하는 것이고, 노동이 의식을 추월할 지경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아날로그 방식이지만 그 결과는 디지털적이다. 아날로그 방식에 충실하고 있지만 디지털에 대해 연상시키는 것, 조각과 회화의 경계에 놓인 것, 자기완결적이면서 확장가능한 것, 그러므로 단순하면서 복잡한 그의 작품은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놓인 탈장르의 것이자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보여주는 유기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태만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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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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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axogml 우리나라에서도 해 주실거죠?^^ 2010.09.30 15:34:01
kim_042 현실적이라... ㅎㅎ 현대인의 욕망을 잘 이해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처럼 꾸준한 작업으로 멋진 스토리를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2010.09.28 10:37:57
min080 김지민작가의 작업은 현실적이어서 좋습니다. 위에 사진보니 고생하시네요. ㅎㅎ 2010.09.14 12: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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